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다. 먼저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책은 여러분의 상태를 잘 설명하여 스스로 그것을 자각할 수 있게 한다.
나의 생각이나 성격, 정체성은 내가 될 수 없다. 내가 O형이라고 해서 O형이 나일 수는 없다. 내 생각이나 성격, 정체성은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이다. 그 요소의 값을 모른다고 해서, 그게 빠진다고 해서 나의 존재가 사라지진 않는다. 나를 나타내는 수많은, 셀 수 없는 요소 중 하나에 사로잡혀 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혐오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하다. 다른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이 스스로가 인지한다면 된 것이다.
단 하나의 정답도, 절대적인 것도 없다. 필요하다고 느끼면 취하면 되고 유해하다고 느끼면 버리면 된다. 수정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수정하면 된다. 세상은 변하기에 나의 대응도 변할 수 있다.
나의 존재도, 이미 일어난 과거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가치판단 하지 말고 그것에 갇히지 말고 있는 그대로 품고 넘어서자. 이 책은 그 과정을 도와준다. ‘상관없다’는 무심한 마음으로 나의 상처를 대하려 노력하다 보면 그로부터 자유로워진, 더 큰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의 행복이지 하나의 진리에 대한 고집과 강요 따위가 아니다.
1장 |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
- 원래 나는 우월하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한다
우리는 열등하고 못난 자신을 진짜 자신과 분리시켜 (자기 분리) 우월한 자아로 못난 자아를 대상화하고 멸시한다. (자기 대상화, 자기 미움) 그럼으로써 이상한 자기 구원이 이루어진다.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희생시켜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스스로를 바로 세우고 우월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시도였음을 알아채야 한다. 다만 효과적이지 않은 방법이었을 뿐.
- 그들의 비난이 어느새 ‘내 것’으로
어릴 때는 주로 외부로부터 부정적 생각이 주입되어 자아상을 형성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주입된 외부의 관점을 ‘나의 고유한 생각’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고 그 동일시하는 의식적 행위를 고집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부정적 자아상을 갖게 되는 기제. 그러나 내 생각은 생각일 뿐 결코 내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앞에서 말한 자기 미움의 숨은 기제를 더욱 선명히 자각하자. 그다음으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생각’을 ‘나 자신’으로 여기기를 멈추어야 한다. 생각은 생각일 뿐 내가 아니다.
- 자책감과 죄책감,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는 마음
앞서 말한 ‘자기 사랑의 왜곡’과 ‘부정적 생각과 자신의 동일시’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기제라면, 자책감과 죄책감은 모든 이들이 뚜렷한 자기 미움의 마음임을 알면서 행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와 일어난 현실을 허락하지 못하는 마음이 나를 괴롭힌다. 이에 대한 유일한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대응은 ‘전적인 수용’이다. 포기하거나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음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존재를 허락하는 것이다. 내가 삶과 존재의 주체가 되어서 말이다.
우리에게는 자기 것이라 착각하는 ‘남의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 세우는 ‘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환상을 고수하면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자책감, 죄책감에서 풀려날 수 있다.
- ‘부정적 나’에도 의존한다
자기 미움의 심리에서는 ‘부정적 나’에 의존하게 된다. 분명 좋지 않고 부정적인 것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내 존재성의 기초 혹은 정체성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끼게 된 데에는 나만의 정당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건강한 자기반성이나 자기 판단이라 여기겠지만 사실은 자신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부정적 나’라는 대상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존재하는 데는 아무런 의존이 필요 없다. 나와 내 존재성의 가치와 의미는 내가 사용하는 의존 대상의 가치와 의미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자학으로 혐오를 방어한다
외부의 혐오나 비난을 막기 위해 자기 미움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타인의 혐오와 미움을 사전에 방어하는 것이다. 사전 자학이 행해지는 또 다른 기제도 있다. 일종의 ‘자기 단련’이라 할 수 있는데, 남들이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를 미워해서 미리 단련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 또한 잘못된 전략이다. 일단 타인이 나를 미워할 것이라는 예상 자체가 환상인 경우가 많다. ‘환상에 대비한 환상’이 되는 셈이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예방효과도 없다.
- ‘현실정당화’라는 심리적 마취제
주어진 여건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이 거기에 반문하고 거절하고 바꾸려 할 가능성이 가장 낮다는 모순된 결과 → 체제정당화 이론. 스스로의 이익에 반대되더라고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면 심리적 고통을 완화해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 감정적, 심리적 진통제이자 일종의 방어심리
자기 미움에서는 ‘개인적인 체제정당화’가 일어난다. → 현실정당화.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정당하다고 여기듯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못난 모습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못난 모습이 실제 내가 아니기도 하지만, 설사 그렇게 느낀다고 해도 그것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무엇’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측정’일 뿐이며, 절대기준이 아니다. 가짜 위안을 선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자.
- 이유에는 언제나 ‘희생양’이 필요하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인간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원인이나 이유를 어떻게든 찾아내고 싶어 한다. 문제는, 우리가 잘못된 일의 원인으로 너무 자주 ‘나의 잘못’을 들이민다는 것이다. ‘진짜 이유’가 아니라 ‘가장 그럴싸한 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일이 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일어난다.
- 나도 나에게는 공평하게 잘 대해줘야 할 타인이다
‘대상화’와 ‘동일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생존의 효율성을 위한 의식의 기본 기능일 뿐, ‘나’도 사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대상이자 타인이므로, 이제부터는 잘 챙겨주고 공평하게 대해주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잘 대해주듯 자신에게도 잘 대해주자. 쉽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2장 | 자기 미움은 어떻게 그들을 향한 혐오가 되는가
- 미워할 가치
그 사람이 내 미움을 받을 가치가 정말 있는가? 내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내 삶의 에너지를 그에게 계속 주는 게 의미가 있는가? 진지하게 질문해보아야 한다. 그럴 가치가 없다면 무심해지라. 자신이 생각하고 주목할 진짜 대상들에 더 관심을 주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 투사, 그것은 ‘내면의 그림자’도 악마성도 아니다
투사 : 자신에게 내재해 있으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특성으로 돌려버리는 수단. 즉 자신의 심리적 속성이 타인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부정적 투사를 해결하는 방법 첫째, 자기 내면의 그림자적인 측면들을 부정성 혹은 악마성으로 느끼는 오류를 멈추는 것이다. 한마디로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상대방이나 외부로의 투사를 눈치채는 것이다. 결국 투사를 해결하려면, 나와 나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다.
- 부러움과 질투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부러움과 질투의 본래 감정은 우월감. ‘네가 아닌 나야말로 그걸 가질 자격이 있는데’ 이게 본마음. 한마디로 ‘너보다 내가 더 우월한데’ 우월감과 열등감은 함께 일어난다. 비교하고 차별하는 마음이 있으니 우월과 열등이 생겨나는 것. 이것은 집착/혐오로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긴 것은 긴 것이고 짧은 것은 짧은 것이지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아니다. 우월과 열등의 비교를 넘어서 자유로워지자.
3장 | ‘나’는 내용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 정체성은 내용이 아닌 느낌이다
우리가 흔히 정체성으로 꼽는 ‘내용’ 중 대표적인 두 가지는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 또는 ‘하고 있는 무엇’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들을 사용하고 활용하긴 하지만, 나는 그것들과 관계없이 온전히 존재할 뿐이다. 정체성은 ‘조건적 내용’이 아니라 ‘비조건적 온전성의 당위에 대한 인지적 자각’ 그리고 ‘그에 기반한 든든하고 당당한 느낌’ 이어야 한다. ‘있음’의 느낌.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이자 존재성이다.
“나는 네가 무엇을 하든 지금 그대로의 너를 지지하고 사랑한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널 지지할게” → ‘내용’은 부수적 도구일 뿐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하다. 조건 없는 존재의 당위성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을 만한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비한정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이 내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정체성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나는 모든 정체성을 품으며 동시에 넘어서 있는 존재이다. 그때그때 필요한 정체성을 자유롭고 여유롭게 가져다 쓰고 보내주는 것이다.
- 시나리오대로 사는 존재, 시나리오를 만드는 주체
정서적 장애가 ‘감정 장애’라면 인지적 장애는 ‘생각 장애’ 혹은 ‘이해 장애’다. 여기서는 인지적 장애를 ‘시나리오 장애’라는 개념으로 풀어보겠다. 즉 인간의 모든 관계와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잘못된 시나리오’에 의해 발생하는 장애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부정적 신화들 → 부모나 교사, 어른들, 또래 친구들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아 형성된 부정적 자아상. 사람만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도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나리오를 주입하는 역할을 한다.
스스로 만드는 부정적 신화들 →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의 병증의 시나리오를 만들게 된다. ‘내 시나리오는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들었으므로 맞을 것이다.’ ‘내 시나리오는 나 자신이다’라는 믿음과 동일시 관념. 익숙한 것이 곧 옳은 것이라는 오류.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특정 시나리오가 있든 없든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존재할 수 있다. 즉 시나리오는 도구일 뿐이지, 시나리오가 우리의 존재성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주입된 외부 시나리오들을 구분해야 한다. 남의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나의 신화적 시나리오도 꾸준히 버릴 건 버리고 수정할 건 수정해 나가자.
- 왜 타인과 세상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본래 목적, 즉 자기인정이다. 단, ‘조건적 자기인정’이 아니라 ‘비조건적 자기인정’ 이어야 한다. 조건들이 없더라도 나는 그냥 나대로 항상 최선을 다하고, 만족스럽고,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된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은 없다.
-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결정’이 아니라 ‘경험’이다
우리는 우선 ‘무엇에든 정해진 답, 올바른 선택, 최상의 결정이 있다’는 환상부터 깨야 한다.
선택과 결정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결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결정한 후에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에 맞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바로 ‘기꺼이 경험해주기’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못할 것도 없다. 결정에 후회하지 않고 결정 후에라도 과정과 결과를 계속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수정이나 전환이 필요할 때는 최선을 다해 하면 된다.
- 너무 급하게 ‘최종적으로 옳을’ 필요는 없다
정답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정답은 항상 움직이며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적절하고 최선인 것’이다. 너무 급하게 ‘내가 옳다’와 ‘최종적 옳음’을 가지려 하지 말자. 그때그때 자신이 생각하고 주장할 수 있는 ‘옳은 것’을 서로 자유롭게 말하고 소통하자. 그렇게 계속 서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다 보면 저절로 서서히 중심이 잡히게 된다. 다만, 그러는 와중에 그게 최종이 아님을 항상 인지하자. 그러면 자신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 나쁜 성격은 없다, 서툰 주인이 있을 뿐
성격이 타고나는 것인지 환경과 성장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가장 최신의 뇌과학 연구들에서도 대략 50대 50의 구도를 이야기한다. 타고난 바탕에 양육과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모든 성격은 그 자체로 존재의의가 있다. 전체를 균형있고 조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성격에 매몰되지 않고 주인으로서 정복해야 하는데, 이를 돕는 두 가지 통찰이 있다.
첫째 통찰, 성격은 내가 아니다. 내가 사용하는 삶의 도구다. 과거 경험, 기억, 학력, 성장 과정, 성격 이 모든 것을 합친다 해도 그것이 ‘나’가 되지는 못한다. 나는 그 어떤 요소로도, 그 모든 요소의 합으로도 감히 제한되고 한정되지 않는다. 몇몇 요소들이 없어도 나는 당당하고 온전하게 여전히 이렇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격’도 나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며, 나 자신은 더더욱 되지 못한다. 나아가 성격에는 유형만 있을 뿐 더 좋은 성격, 나쁜 성격 따위는 없다. 그 성격을 내가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둘째 통찰, 내 성격의 유형을 파악하고 받아들이고 이용하자. 약점으로 보고 보완하려 하지 말고 성격 자체를 강점으로 살리자. ‘성격’이라는 도구를 잘 알아야 잘 이용할 수 있다. 먼저 잘 파악하도록 하자. 다만 자신의 성격유형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가볍게 파악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악했다면 강점으로 살리는 작업을 하자. 예민하거나 민감한 것이 아니라 섬세한 것이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인 것이다. 차가운 것이 아니라 평정한 것이다. 무정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다. 본래 성격에는 약점 같은 건 없다. 오직 당사자가 잘 이용하느냐 아니냐만 있을 뿐이다. 내 성격은 본래 나의 강점이다.
나 자신을 정의하거나 단정할 때가 있을 텐데, 그 내용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한 가지 정보로 이용할지언정 나의 전부 혹은 절대 사실로 여기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란 존재는 어떠한 제한으로도 묶을 수 없으며 그런 것 없이도 항상 지금처럼 당당히 존재한다.
- 어느 날 문득 ‘나’를 찾은 소녀 이야기
부정적인 엄마로부터 부정적 자아상이 형성되었던 소녀. 임계점을 넘는 어느 순간, 문득 엄마가 자신을 정의 내리고 불렀던 부정적 이름들이 본인을 제한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순간 그녀는 자유가 되었다. 내 모습이라 믿었던 것들이 마음이 아픈 엄마가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서 나에게 붙였던 단어일 뿐임을 알게 되면서 그 모든 이름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소녀는 더 이상 자신이 한낱 이름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아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당하고 유연하게 충만하고 자랑스러운 자기 존재를 만끽했다. 부정적 이름이든 긍정적 이름이든 상관없이 필요할 때 자유롭게 가져다 썼다. 그러면서 그 이름들과 상관없이 항상 본연의 존재로 존재했다. 자연스럽고 당당하고 유연하고 충만하고 만족스럽고 사랑스럽게 여유롭게
4장 | 상처, 겪지 않는 게 아니라 별것 아니게 되는 것
- 상처, 없애는 게 아니라 품고 넘어서는 것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생긴다. 하지만 문제는 지속시간이다. 존재 자체를 내가 부정하고 허락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더 힘들어진다.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억압과 무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상처를 겪지 않는 게 아니라 별것 아님을 아는 것. 상처가 없어져야만 괜찮은 것이 아니라, 상처가 있든 없든 상관없게 되는 것. 개의치 않게 되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품고 넘어섬’이다. 너무 쉽게 하는 말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가장 적극적인 치유와 극복과 공감과 품고 넘어섬을 통해 나온 아주 치열한 말이다.
이제 내가 그것보다 더 커져서 더 이상 그것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됨으로써, 품고 넘어섬으로써 ‘상처가 상처가 아니게 되는 것’이 치유의 근본이라는 점을 생각하자.
- 신경 쓰이는 ‘그 기억’에 무심해지는 법
내게 느껴지고 떠오른다고 해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무작위한 것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동적으로 ‘중요한 것이야’라고 후해석을 갖다 붙인다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비록 지금 나에게 느껴지고 떠오르지만, 중요한 건 아니야!’라고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하지 않다고? 왜 그렇지?’라고 의문도 가져보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각해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의심하고 격파해야 한다.
그다음은 느껴지고 떠오르는 것들을 제대로 처리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무심해지는 것,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이게 잘될수록 그놈들에 대해 심드렁해진다.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하라. 반복해서 대응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이다.
더 강력한 방법은 그놈들이 떠올라도, 자꾸 신경 쓰여도 그 자체에 심드렁해지는 것이다. 신경 쓴다고 실망하거나 부담 갖지 말고, 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고민하지 말라.
두 방법에 앞서 우선은 ‘눈치 채기’를 확실하게 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존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고, 재인식’ 하는 것이고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인식이 바뀐 뒤에는 구체적인 실행으로 과거의 습관, 관성을 처리해야 한다. 반복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
- 상처가 아니라 치유의 기회다
우리 뇌가 좋지 않은 기억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이미 경험한 부정적 일을 되새김질시켜 차후에 조심하게 하려는 ‘자기보호 기제’일 수 있다. 기억과 연관된 감정들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잘 사용해서 앞으로 주의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재기억’의 본래 목적이자 이유임을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그 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는 게 답이다. 자신을 위해서 불가능한 바람은 이제 그만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다시 기억이 떠오르는 것, 다시 경험하는 것, 다시 강하게 느끼는 것은 자가 심리치유의 기회가 된다. 느낌이 올 때 ‘아, 치유의 기회다!’라고 자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서 결속을 풀자.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면 과거의 사실이 남아 있어도 더 이상 상관없게 된다.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은 ‘느낌’이다. 첫째, 의도적으로 재인식함으로써 과거 느낌을 분리하고 중화한다. 둘째, 느껴져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중요도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중요도를 부여한 주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셋째, 중립적인 혹은 반대되는 느낌과 상황을 의도적으로 떠올리거나 느낀다. 혹은 다르게 이해하거나 인식을 바꾼다.
이제는 좋지 않은 기억과 경험이 떠오르고 몰입될 때 무의식적으로 반복만 하지 말자. 의식적으로 재인식하고 나를 위해, 나의 삶을 위해 바꿀 수 있는 기회임을 생각하자.
- 부정적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이미 느끼고 있는 감정을 거부하거나 멈추거나 바꾸려 하지 말라. 살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가장 큰 행태 중 하나는 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것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행위다. 일단 어떤 감정이든 나타난 그대로 허락하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개의치 않는 것이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그냥 느껴주는 것이다. 휘둘리거나 매몰되지 않고. ‘있든 없든 상관없음’의 마음이다. 나오는 감정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하면 감정에 대한 무조건적 반응이 점점 사그라들게 된다. 감정에 빠지든 감정을 부정하든 모두 감정을 붙드는 것이다. 이 행위를 멈추자는 것이다.
-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넘어서는 방법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 ‘다름’이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연에서는 똑같은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드물다. 즉 기본은 ‘다름’이다. 부정적 반응을 가상의 두려움 경계 거부감으로 추가 연결하지 말자.
- 나는 얼마나 나를 ‘기꺼이’ 경험해주고 있나?
하나, 나는 내 몸을 얼마나 기꺼이 경험해주고 있는가? 피부색, 머릿결, 키 등 사람마다 타고나는 몸의 여러 특징이 있다.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과 자연스러움인 것이다.
둘,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잘 챙겨주고 있는가? 무시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선 안 된다. 나의 감정, 느낌은 나에게는 우주적 진리다. 기분에 매몰되고 휘말리라는 뜻이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느껴주고 받아주고 챙겨주자. 그러면 내 감정들은 스스로 피어나고 치유되고 지나간다.
셋, 나는 내 생각들을 얼마나 기꺼이 경험해주고 있는가? 내가 생각의 주인이지 생각이 내가 아님을 눈치 채고 생각을 부정하거나 생각에 매몰되지 말고 기꺼이 경험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은 나와 삶의 도구일 뿐임을.
넷, 내 행위와 환경과 상황을 보자. 하나의 법칙만 잘 활용하면 된다. ‘나의 일과 신의 일의 구분’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최선을 다해 해주면 된다.
마지막으로, 나의 존재성을 보자. 앞서 본 내 느낌, 생각, 행동과 그 이상의 모든 총합이 바로 나의 존재성이다. 내 전체 존재성을 기꺼이 경험해주고 있는가? 부정하며 피하고 무시하고 없는 척하고 있는가? 그런 게 있다면 이제 하나씩 기꺼이 경험해주고 점령해 나가자. 그러는 동시에 타인과 세상과 관계없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경험해주는 삶을 살자. 그리고 마침내 타인과 세상까지도 기꺼이 품고 기꺼이 넘어주자.
5장 | 관계의 주인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들에게
주인공, 우리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항상 온전하게 존재한다. 주인공, 때로는 비주인공이라는 원을 바닥에 그려 필요할 때마다 들어갔다가 나오면 된다. 우리는 이 모든 설정과 원을 만들고 그린 주인이지 그 안에 갇힐 존재들이 아니다.
- 나를 괴롭히는 ‘반대 의견’ 대처법
상대방이 표현한 생각, 의견은 그 사람이 던진 공일 뿐이다. 그 사람 이 공이 아닌 것처럼 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은 그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공격하거나 미워하고 화를 낸다. 나와 다른 의견은 ‘의견’일 뿐, 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생각의 다름조차 허용하고 수용하지 못하면 정신적 독재자가 되는 것.
- 더 이상 ‘만만한 사람’ 되지 않기
타인과 사회가 제시하는 프레임은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다. 단지 ‘생각의 틀’일 뿐이다. 외부 프레임이라고 해서 모두 수용할 것도 부정할 것도 아니다. 유리하다면 받아들이고 활용하면 된다. 프레임에 갇힐 필요 없이 필요하면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지나치면 되는 것이다. 프레임은 내가 아니고 너도 아니다. 갇힐 필요가 없고 가둬두는 게 목적이 아니다. 불필요한 프레임으로부터의 자유를 함께 누리자.
- 또 다른 나를 통해 나를 다시 만나다
삶에서 맺게 되는 어떤 관계든 관계의 인연이 다해서 멈추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해 소중히 여기고 잘 보살펴주자. 모든 관계는 곧 기회다. 존재들의 자기 사랑의 완성을 위한.
- 두 개의 진리
한 개의 진리에 대한 믿음과 고집과 강요가 우리를 힘들게 한다면 굳이 그것만 붙잡지 말고 나의 진리도 보고 너의 진리도 함께 보자. 그리고 다른 많은 우리의 진리도 필요하다면 같이 봐주자. 진짜 목표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행복이지 진리 따위가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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