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젠더에 관한 진화생물학적 관점의 서적들을 읽다 보니 딱,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진화를 이해하려면 이들의 행동의 유전적 배경을 알기 위해 수백만 년의 시간 단위에서 생각해야 한다”지만 지금 존재하는 나와 나의 부모, 조부모 그리고 그 윗세대도 인생의 목표를 번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이 양육에 필요한 자산이 많은 사람이 기준이 되어, 혹은 번식에 유리한 젊은 난자를 지닌 사람이 기준이 되어 성관계 하지도 않는다. 그래야만 했던 환경(번식이 ‘필요’한 것과 별개로 개인 삶의 최대 목표가 번식이었던 환경이 있었을까도 의문)이 아니게 된 지 한참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우리의 행동 양식이 그렇게 맞춰져 있다고? 이 논리대로라면 성 역할과 차별이 타당하게 되는 건데, 성 평등을 위해 나아가는 지금 세상에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다가 찾게 된 책이다.
책은 성차별을 부추기는 진화심리학과 그 학자들의 논리에 대한 반박을 적고 있다. 우리가 왜 진화심리학의 논리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진화심리학의 논리가 어떤 식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는지, 그것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짚어준다. 독립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책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의 논리에 대한 반박을 쓴 책이라 한정된 내용 안에서 기술된 것이 아쉽다. 또한 상당히 감정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가 있어 독자로 하여금 주장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에 가졌던 의문을 짚어주는 것으로써의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 마리 루티는 여전히 진행 중인 진화심리학의 시대착오적 관계 패러다임의 문제점과,
젠더 관계의 구질서를 하나하나 짚어내면서 진화심리학이 개선해야 할 방향,
우리가 맹신하는 과학이 때로는 터무니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비전문가인 대중들이 이러한 젠더 프로파일링에 어떻게 현혹되는지,
진화심리학 서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게다가 그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연구 목표나 그들의 담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전문가인 일반 독자들에게 무슨 내용을 전달하는가에 방점을 둔다.
1. 남성 대 여성이라는 근시안적 관점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 ‘구애하는 남성과 선택하는 여성’이라는 진화론의 주장을 펼친다. 남성의 정자는 무한히 공급되기 때문에 섹스를 밝히고 다다익선인 반면 여성의 난자는 개수가 한정되어 신중하고 정숙하다고 말한다. 남성은 임신 가능성이 높은 젊은 여성을 선호하고 여성은 자녀 양육에 많은 자원을 제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는 비교적 나이 든 남성을 선호한다고 주장한다. 인생의 목적은 번식이고 그것을 위해서 행동하며, 따라서 자신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 않는 동성애자들은 진화적으로 비정상이라고 말한다. 다윈이 진화론을 구상한 사회(빅토리아 시대 영국)는 식민지 군대를 미화하고, 정숙한 아내들에게 충실하고 성적으로 수동적인 역할을 종용하던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번식과 무관한 섹스를 하며 동성 간 성행위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 사이에서도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여전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 공동의 관심사를 가질 수 있고, 그래서 그들은 가치, 목표, 기본적인 인생관을 공유하는 사람을 원할 수도 있다는 것은 진화심리학자들에게 완전히 낯선 개념인 듯하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천적’임을 입증하는 데 이상할 정도로 많은 정열을 쏟는다.
진화론자 로버트 라이트는 진화심리학이 자유의지 개념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시인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거나 칭찬받는 모든 행위는 어떤 비물질적인 ‘나’의 선택이 아니라, 물리적 필연이다” 다윈은 이러한 생물학적 결정론이 윤리적 책임 의식을 약화시킴으로써 사회의 도덕적 구조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문화는 자연적 질서가 곧 올바른 질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자연의 질서를 인정하기보다 인간 중심적 관점으로 질서를 선택하여 만든다.) 따라서 누군가 자연적 질서를 어떻게 묘사하는지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들이 문화적 믿음뿐 아니라 사회 정책을 지배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2. 성차이의 이데올로기
데이비드 버스는 남성과 여성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에 주목하여 데이터를 생성했다. 성차이에 초점을 맞추는 것 자체가 이념적인 결정. 비슷한 점보다는 차이를 강조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진화심리학 분야가 은밀하게 몰두하는 일들에 대한 꽤 많은 정보를 준다. 성차이가 주로 남성과 여성의 상충하는 번식 전략에서 비롯된다는 생각 (즉 남성과 여성은 문화적 존재이기보다 생물학적 존재라는 생각)을 완고하게 고집. 데이비드 버스는 그의 논문들 가운데 하나에서 성별이 미치는 효과는 문화가 미치는 효과보다 크게 낮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시인한다. 데이터에 따른다면 그는 배우자를 고를 때 남성과 여성이 같은 자질을 선호한다고 주장하는 책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짝짓기 행동을 번식 욕구와 동일시하고 싶은 진화심리학적 욕구로 인해, 진화심리학자들은 번번이 중요한 사회심리적 복잡성들을 무시하는 결론에 이른다. 사람들은 단순히 번식 전략만을 바탕으로 짝을 고르지 않는다. 우리는 특정한 사람, 특정한 배우자를 진화심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전혀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경험한다.
남자에게는 정자라는 무한 자원이 있기에 여러 목표(여러 여성과의 번식)를 달성하기 위해 한 여성에게 투자하는 정서적 자원을 줄이고, 여성은 한정적 자원(난자)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아끼고 있다는 주장은 여성을 억압하는 것이 생득권이라고 생각하는 가부장적 남성에게 좋은 논리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애초에 남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부추기는 성 적대감은 문제의 근원이다.
3. 오만한 반발
진화심리학이 제시하는 모범 답안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나머지 분야 사람들이 수십 년에 걸쳐 해체해온 성 고정관념을 원상 복구시키고 거기에 과학적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영아 사망률이 낮은 선진국들은 성 평등 지수도 높다. 만일 살아남는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 목표라면, 성 평등이 그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처럼 보인다. 성 평등 수준이 높아진 것에 더해 우리는 인간 잠재력을 더 폭넓게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진화심리학 측은 “차이가 불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얼버무릴 것이다. 하지만 남녀 관계의 역사를 돌아볼 때 분명한 사실은, 차이를 강조하는 태도는 불평등을 조장하기 쉽다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모범 답안의 가장 큰 결함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생물학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다. 인간의 성행동은 번식 외에 훨씬 더 복잡한 이유가 작용한다. 본성과 양육, 두 가지 모두의 작용으로 인간은 형성된다. 이는 문화가 처음부터 생물학적 구조 안으로 접혀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인간을 순수한 생물학적 존재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진화심리학자들은 마치 인간의 연애 행동에서 생물학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인 듯 말한다. 진화론적 추론이 전반적으로 그럴 텐데, 사회 변화가 심리 변화를 초래할 여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단점 존재. 저자는 결코 과학에 반대하지 않으나 과학만이 우리의 심리적, 정서적, 윤리적, 존재론적 난제들을 포함한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4. 조신한 여성의 몰락
번식과 관련 없는 성 활동을 일상적으로 하고 암컷과 수컷이 비교적 평등하며 수컷에게서 공격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보노보의 예. 보노보의 유독 문란한 성생활이 우리가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성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는 사실.
인간 사회는 경작을 하고 가축을 기르면서 사유 재산이 쟁점으로 떠올랐고 재산을 자손에게 물려주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이는 자식이 친자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남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가부장적 사회 배치가 부상한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사회 체제에서 여성의 가치는 주로 정절로 결정되었다. 여성의 성에 대한 감시는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특정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는 여성의 성욕을 은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여성은 성욕이 없다고 말하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성욕을 억누르기 위해 여성의 음핵을 절제하는 수술까지 했다. 많은 남성이 만성적인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것은 여성의 ‘본성’이 아니라 가부장제 때문임을 암시한다. 만일 당신이 누리는 섹스의 기회가 충분하지 않다면 여성을 탓하지 말고,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권력, 부, 지위를 누리게 하라. 그런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일부일처제는 생물학적이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문화적 규범이다.
5. 낙관주의의 잔혹함
2000년 이래로 과학 학술지들은 남녀 차이에 관한 논문을 3만 편 넘게 게재했고, 신경과학자들은 뇌 작동에 관한 남녀 차이들을 추적하고 있으며, 교육 전문가들은 남학생과 여학생의 강점이 서로 상반된다는 생각(예를 들면 남학생은 수학, 여학생은 어학을 잘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성별에 따른 차별화된 학습 전략들을 고안하느라 분주하다. → 젠더 프로파일링. 진화심리학이 젠더 프로파일링 모델에 ‘과학적’ 신뢰를 실어주었다. 과학이 끼어들어 남자들은 정말로 이렇고 여자들은 정말로 저렇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말할 때, 우리를 사회적,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제약해왔던 젠더와 성에 관한 규범들을 완화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젠더 프로파일링의 호소력은 남성이란 존재를 제대로 알면 행복과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는 개념에서 나온다. 남녀가 다른 것이 문제라고 추정하는 것은, 관계 맺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복잡한 일임을 인정하는 것보다 쉽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로렌 벌랜트가 ‘잔혹한 낙관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넘어가고, 그들을 만족시킬 리 없는 이분법적인 남녀 관계 모델을 신뢰하게 된다. (잔혹한 낙관주의 : 우리를 해치는 사회적 배치, 이데올로기, 삶의 방식이 결국에는 결실을 맺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완강하고 비이성적인 믿음) 해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이러한 낙관주의적 애착은 정상이라고 느끼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속한다’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하고 그 결과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우리에게 납득시키는 규범에 따른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비극을 보증하는 동시에 그들을 부차적 지위로 떨어뜨리는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간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이성애 정상성과 직결, 결혼(생물정치적 관리)과도 관련. 직설적으로 말하면, 욕망은 문화적 질서를 유지하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젠더 프로파일링은 남녀사용설명서인척하면서 성에 대한 이분법적 논리를 보편화시키고 차별과 억압을 공고히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정관념은 사람들을 쉽게 범주화하고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에게 특정한 성 역할을 동반하는 전통적인 결혼 제도가 행복의 요람임을 납득시키려고 시도하는 규율 과정들을 방해하는 힘은 없을까? 있다. 욕망이다. 욕망 → 그 이상을 원하는 것 → 정치사상의 시작. 혹시 다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유토피아적 사고. 이것이 복지를 만들고 삶의 질 향상시킨다.
나도 젠더 프로파일링에 브레인 워싱 되었음을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이분법적 사고로 남자와 여자는 너무나도 다르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부정적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남녀가 얼마나 다른지 그 차이에만 주목했다. 남녀는 차이점보다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비단 남녀관계만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와 똑같은 존재는 없고 모두 각자의 개성이 있으며 존재란 무수히 다양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어렵지 않은 사실에 대해 새삼 놀랍게 자각하게 되었다. 남자는, 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본성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우생학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만 설명 가능하지 않은 복잡다단한 존재이다. 전에 읽었던 다른 진화생물학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인간은 본성과 양육 두 가지 모두의 작용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양자물리학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처음 해봤던 사고가 있는데, 더 큰 질서와 시공간 속에서 우리를 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질서는 실존하는 질서의 지극히 작은 일부여서 이것을 질서라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한정된 정보로 모든 것을 범주화하고 다양성을 지운다. 그러는 것이 통제가 쉽기 때문에... 유전자 풀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진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진화론의 아버지 다윈의 주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양성을 지우는 것은 진화생물학적으로도 사회학적으로도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불필요한 소모전을 그만두고 우리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과학적 논리에 대한 부분은 다른 책으로 보충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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