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50인이 뽑은 2022년 올해의 소설로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가볍게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나 여러 번 읽고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 더 좋았다. 이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첫 장에 위치해 이 단편집을 열어주는데, 상당히 강렬하다. 짧은 이야기 속에 여러 시간이 중첩되어 있고 그 시간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편집 전체는 시간과 상실, 그것의 극복 대하여 이야기한다. 시간의 정의를 새롭게 해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고 삶을 긍정한다. 저자 개인적으로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경험을 한 후에 쓴 글이라고 봤는데, 상실감과 공허가 곳곳에 묻어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추스르고 나아가는지까지 보여주는 책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작가가 최근 2~3년간 집중적으로 단편 작업에 매진한 끝에 선보이는 소설집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김연수의 변화된 시각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김연수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흐르는 것으로만 여겨지는 시간을 다르게 정의함으로써 우리가 현재의 시간을, 즉 삶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름답고
서정적인 언어로 설득해 낸다. 특별한 점은 그 가능성이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떠들썩했던 1999년 여름,
동반자살을 결심한 스물한 살의 두 대학생은 뜻밖의 계기로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 『재와 먼지』를 접한 뒤
의외의 선택을 하게 되고(「이토록 평범한 미래」), 아이를 잃고 아득한 어둠 속에 갇혀 있던 한 인물은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바다 앞에서 이백 년 전에 그 바다를 지난 역사 속 인물인 ‘정난주’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다(「난주의 바다 앞에서」). 그뿐 아니라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마치 이야기가 현재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실험하는 신중한 관찰자처럼.
그렇게 이야기와 삶이 서로를 넘나들며 아름답게 스며드는 과정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왜 어떤 삶은 이야기를 접한 뒤 새롭게 시작되는지, 그리고 이야기를 사랑하면 왜 삶에 충실해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야기가 지닌 힘을 끝까지 의심에 부친 끝에 도출해 낸,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젠가 세상의 모든 것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게 되리라고 믿는
이야기 중독자”(「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김연수의 각별한 결과물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화자가 대학생이었던 1999년은 종말론으로 떠들썩했다. 지구 종말에 대한 여러 예언이 있었으나 그 예언들은 모두 언어로 전달된 것이다. 언어는 번역이나 전해지는 과정에서 왜곡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은 허상이라는 생각을 소설 속 에세이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우리 인생은 행복의 바다다. 이 바다에 파도가 일면 그 모습이 가려진다. 파도는 바다에서 비롯되지만 바다가 아니며, 결국에는 바다를 가린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p18. 소설 속 김원이 쓴 에세이 [자유로운 마음] 서문
대학생이었던 당시, 화자가 좋아하던 친구인 지민의 어머니는 소설가였다. 지민의 어머니는 1972년 10월을 시간의 끝으로 부르고 동반자살하기로 한 연인에 대한 소설 [재와 먼지]를 썼으나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검열당한다. 고통받던 지민의 어머니는 자살하고 지민은 어머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성장한다. 대학생이 된 지민은 화자의 도움으로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화자의 삼촌에게 본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소설 [재와 먼지]에 대해 듣길 원한다.
[재와 먼지]의 내용은 이렇다. 한 연인은 둘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인 1972년 10월 동반자살을 하기로 한다. 그러나 동반자살을 한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둘은 미래,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과거인 시간을 적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좋은 게 가장 나중에 온다고 상상하는 일(기대)이 현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알게 된 두 사람. 시간은 거꾸로 흘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순간에 이르고, 그 순간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흘러 세 번째 삶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인식의 패턴이 바뀌어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며 같은 시간의 흐름을 두 번 산다.
화자의 삼촌은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지민에게 지민과 화자가 결혼하게 된다고 하면, 미래의 그 일을 원인으로 지금이 어떻게 달라질까 묻는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지민의 엄마도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것이라 말하는 화자의 삼촌
현재의 시간으로 넘어와 부부가 된 화자와 지민은 대화를 한다. 1999년 당시 화자의 삼촌과 대화를 마치고 줄리아라는 예언자를 찾아갔던 두 사람
"그때 우리가 신에게 한 질문 기억나? 두 가지였어. 지구는 멸망합니까? 이건 자기 질문.
제가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건 내 질문. 거기에 대한 신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지.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게. 그런데 살아보니까 그건 놀라운 말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말이더라.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고 우리는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잖아.
줄리아는 그냥 이 사실을 말한 거야. 다만 이십 년 빨리 말했을 뿐.
그 시차가 평범한 말을 신의 말처럼 들리게 한 거야.
소설에 미래를 기억하라고 쓴 엄마는 왜 죽었을까? 그게 늘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화자와 지민의 대학생 시절과 현재 부부가 되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이어져 나오면서 그 사이, 화자가 읽었던 에세이 [자유로운 마음]의 저자 김원의 카지노에서의 경험담도 소개된다. 김원은 다섯 번 연속으로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을 확인한 후 그 반대의 결과에 배팅하면 이길 확률이 98.5퍼센트인 것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했지만 예상은 빗나갔고 판돈을 모두 잃은 후에 밥값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김원은 여기서 깨달음을 얻는다. 계속 지는 한 다음번에 이길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이다. 결국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기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원의 카지노에서의 깨달음과 [재와 먼지], 화자와 지민 부부의 이야기는 모두 연결되며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이토록 평범한 미래> -p.34
이어지는 단편들에서도 자식을 잃고, 배우자를 잃고, 부모를 잃은 상실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러나 저자는 이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이 어떻게 인식의 전환을 통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는지 보여준다.
또한 곳곳에 정부와 나라의 억압, 부당함에 저항하는 이야기들이 있고 이 역시 미래를 포기하지 않으면 꿈꾸는 미래는 반드시 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한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 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 p27.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 p121.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중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네.
- p235.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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