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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정리

우리에게 서사가 필요한 이유 <서사의 위기>

by 몬mone 2024. 1. 23.

 

 

 

 

 

정보의 과잉, 형식의 숏폼화는 찰나의 디지털 소통을 늘리지만 결국은 시간을 좁은 궤도로 압축시켜 역사를 지우고 서사를 없애고 관계를 단절시킨다. 정보의 나열은 서사적 성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보 과잉, 서사 상실의 시대에 우리는 사유하지 않게 된다. 이야기는 상상하게 하고 미래를 꿈꾸게 한다. 또 이야기는 세계를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친밀감을 느끼게 하고 감정적 연결의 허들을 낮춰 현실의 위기 또한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이야기 나누기에 필요한 경청은 상대를 중요한 사람으로 존중함으로써 우리를 연결시키고 치유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상업화되고 도구화된 서사는 정보의 특성을 띤다. 이러한 서사는 우리를 개인화하고 관계의 단절을 불러온다.

 

 

 

 


 

 

 

 

이야기에서 정보로

서사,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전승적 지식,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구조로 되어 있다. 지식의 원격성, 그러나 이의 해체는 근대의 특징. 정보란 이러한 무간격성의 자연적 발현. 반면 지식은 가용범위에 있지 않은 원격성이 특징. 정보는 새로운 동안에만 가치가 있음. 정보는 리포터의 매체, 이야기는 그 반대. 근대의 서사적 위기는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는 데 원인이 있다.

정보는 좁은 최신성의 폭 때문에 매우 빠르게 소진. 확인을 마친 후에는 무의미성으로 침잠.

하지만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 언론이 지배수단으로 부상.

신자유주의의 정보체제는 자유를 혹사한다. 자유와 소통의 탈 속에 숨어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걸라고 요구. 그러면서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의 손에 내맡겨진다.

 

경험의 빈곤

정보의 쓰나미로 서사의 위기 악화,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압축.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

 

설명되는 삶

행복은 하나의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다. 행복은 과거까지 닿아 있는 긴 꼬리를 갖는다. 인간은 순간에 예속된 존재가 아니다.

디지털화는 시간적 위축증을 악화시킨다. 찰나의 소통. 시각적 정보에 불과. 삶의 사건들은 단순한 정보로만 취급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긴 이야기도 직조되지 않는다. 이들은 서사적 맥락 없이 그저 접속사로 연결된 채 나열된다. 서사적 성찰은 요구되지 않는다.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벌거벗은 삶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며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 정보사회와 투명사회에서 벌거벗음은 외설(포르노)로 확대된다. 겉을 감싸는 설득적이고 서사적인 껍질 없이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세계의 탈신비화

이야기 능력이 상실되면 허무와 우연성이 강해진다. 이야기는 자신의 내면에서 사건들을 잇는 새로운 실을 뽑아낸다. (단편적 정보의 나열만 있는 일기 vs 서사와 감정, 관계가 담겨있는 일기)

단순히 눈앞의 존재를 이루는 날것의 현사실성은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탈신비화되면 모든 세계관계가 인과성으로 축소된다. 인과성은 기계적이고 피상적. 세계관계는 깊은 공감으로 연결된 세계다. 탈신비화는 탈아우라화, 아우라는 서사적 핵심을 지니고 있다. 서사성은 연대기적 현사실성과는 반대된다. 정보는 세계를 탈아우라화하고 탈신비화한다. 정보는 언어의 극명한 수축 단계를 나타낸다. (우리는 어쩌다 사랑하게 된걸까 우리의 만남은 어떻게 흘러갈까 이 감정은 무얼까 > 신비, 아우라, 관계성, 서사 사랑은 뇌 호르몬의 작용 > 탈신비, 탈아우라, 인과성, 정보)

 

충격에서 ‘좋아요’로

의식은 침투한 자극이 정신의 심층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다. 충격이 의식에 의해 방어되면 충격을 유발한 해당 사건은 경험으로 감쇄된다. (외상성 충격을 경험으로 소화)

지금의 현실은 스마트폰에서 너무 축소되어 현실의 인상이 더 이상 충격의 순간을 포함하지 않는다. 현실은 화면의 단편에 지나지 않고 충격은 ‘좋아요’로 대체된다. 실제와 우리 사이의 차단.시선우리를 바라보는 상대방을 차단.

근대 사회의 자극 홍수에 우리의 지각은 점차 둔해진다.

 

이야기로서의 이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양의 데이터가 기존의 이론들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들 수도 있다. 인간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제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되어 있다면, 숫자가 알아서 측정해 결과를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데이터는 상관관계만 파악하지 왜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이론의 종말을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데이터 기반 정신과학은 정신을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데이터과학이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 신화로서의 철학은 새로운 삶과 존재형식까지도 이야기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지각을 가능케 한다. 이야기는 미래를 열어준다. 우리는 사유가 결국 그 자체로 이야기라는 것과 이야기의 단계를 거쳐 나가는 것임을 지각해야 한다.

 

치유의 스토리텔링

이야기는 세계를 익숙한 집으로 변신시킨다. 그러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하고 치유의 효과를 발휘한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 환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 슬픔은 억압적인 현사실성이 서사적 외관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제거된다.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 경청은 상대에게 이야기할 영감을 주고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공명의 공간을 열어준다. 접촉의 빈곤, 이야기의 빈곤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디지털화의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은 늘어가는 연결성.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 (광고)

 

이야기 공동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과도하게 소통한다. 게시하고, 공유하고, 링크를 건다.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하지만 이들은 체제를 만드는 서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함으로 공동체 형성을 방해한다. 보수적, 국수주의적 서사는 배타적이고 차별적이다.

공동체 이야기 없이는 공동 행위를 가능케 하는 강력한 의미의 정치가 생겨날 수 없다. 서사는 오늘날 계속해서 탈정치화되고 있다. 오늘날의 탈정치화된 서사를 통해 우리는 서사를 발전시키는 공동체가 아닌, 자기 자신의 자아와 연결된다. (개인화, 관계 단절)

 

스토리셀링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도구화하고 상업화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정보의 특성을 많이 띤다. 덧없고, 임의적이고, 소모적. 삶을 안정시킬 힘이 없다. (광고) 서사의 내용이 실제 사용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 (비전보다 쇼에 치중하는 정치인)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된다.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

 

 

 


 

 

 

단편화된 정보의 과잉이 왜 문제인지, 우리에게 왜 서사가 필요한지 핵심을 짚는 책이었다. 부연설명을 걷어내고 핵심만 논하는 것을, 결론만 말하는 것을 왜 인간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인지 이 책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정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요즘의 단편화되어 스쳐가는 정보들이 문제인거지, 정보도 사유가 될 수 있다. 난 서사의 책(소설) 보단 정보의 책(사회 과학, 순수 과학)을 선호하는 편이다. 정보를 통해 사유할 수 있다면 문제없다. 사유의 중요성과 서사의 효능에 대하여 짚어주는 책이었다. 나조차도 요즘 시대의 숏폼화가 문제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것의 효과를 깊고 멀리 생각하여 글로 정리해 본 적은 없었다. 요즘의 정보와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도 짧게 스쳐갔을 뿐. 더 많이 사유하고 반드시 글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 이것을 나누는 것이 서사 위기의 시대에 필요할 것 같다.